1920년대 광주지방의 청년·학생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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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12-09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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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촌면에 소재한 ㄱ청년회의 경우, 집행행위원장 이동현을 ...






농촌지역 청년회를 주도한 청년들도 소부르주아 지식청년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광주 일기자, 앞의 글(사), 동아일보 1926. 10. 2. 광주청년회의 강령은 조선청년총동맹의 강령인 “대중 본위인 신사회 건설을 기도함” “조선민중해방운동의 선구가 되기를 기도함”을 모델로 삼았다. 대촌면에 소재한 ㄱ청년회의 경우, 집행행위원장 이동현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은 청년회 산하 야학강습소의 강사이기도 하였다.
1920년대 광주지방의 청년·학생운동
농촌지역 청년회를 주도한 청년들도 소부르주아 지식청년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창립 당시 광주청년회가 ‘청년의 지·덕·체 수양’을 표방했던 사실과 비교할 때, 신강령은 …(To be continued )
농촌지역 청년회를 주도한 청년들도 소부르주아 지식청년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청년운동의 지도부가 20대의 소부르주아 지식청년으로 교체되면서 청년운동의 지향은 급선회하였다. 대촌면에 소재한 ㄱ청년회의 경우, 집행행위원장 이동현을 ... , 1920년대 광주지방의 청년·학생운동인문사회레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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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우치노농청년회의 간부인 김기열은 우치노농학원 강사로 활약했다. 1924년경부터 광주청년회는 “계급적 단결로 해방운동의 전위가 되어 민중 본위의 신사회 건설을 目標(목표)”로 삼는다는 강령을 채택하였다. 동아일보 1925. 10.31, 11. 15 ; 시대일보 1925. 12. 8, 1926. 5. 31
농촌 청년회의 가장 중요한 사업이 야학을 운영하는 일이었음을 고려하면, 청년회 간부진의 사회적 존재형태를 농촌 지식인으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하겠다.